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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겨울
서평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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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사랑에 대해서 너무 많이 모를 수는 없다

아무도 사랑에 대해서 너무 많이 모를 수는 없다

서명 : 사랑이, 내게로 왔다

글쓴이 : 김미현 문학평론가·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교수

저/역자 : 이주향

출판사 : 시작

2008-09-22 / 296쪽 / 11000원 / 독자대상 : 고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언제나 잘못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다시 말해져야 한다. 하지만 잘못 말하는 것, 여러 번 말하는 것은 아예 말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사랑에 관한 말들이 모두 틀린 말인 동시에 맞는 말인 이유, 지금도 사랑에 관한 말들이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구나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에서 ‘삶’을 ‘사랑’으로만 바꿔 다음처럼 패러디해서 말할 수 있다면 더욱 그렇다.
“사랑이란 그 사랑을 겪는 사람의 것이지,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의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사랑이란 치통과 같다.”

이주향의 『사랑이, 내게로 왔다』의 앞표지를 장식하는 김아타의 사진과, “순간순간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랑의 의문들을 명작의 깊은 향기, 철학적 단상으로 풀어내다”라는 문구는 이 책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저자 이주향은 아무것도 모른 채 알몸으로 낯선 사람과 만난 열다섯 명의 커플들을 3개월에 걸쳐 촬영하여 15컷을 하나로 만든 사진작가 김아타의 사진에서 정직함과 자유로움이라는 사랑의 본질을 엿본다. 그리고 그것은 “한 사랑에는 모든 사랑이 녹아있고 모든 사랑은 한 사랑으로 통합니다”라는 말과, “사랑 없는 평화보다 사랑 있는 갈등이 낫다”는 말로 요약된다.
이런 사랑의 입체성과 가역성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때문에 저자는 자신의 전공영역을 살려 “철학적 단상”을 펼치면서 사랑을 다룬 33편의 문학작품 속에 나타난 “명작의 깊은 향기”를 전해준다. 이로써 문학 속의 사랑과 철학적 의미로서의 사랑이 따로따로 논의될 때는 경험할 수 없는 문학적 감수성과 철학적 깊이가 시너지 효과를 통해 동시에 전달되고 있다. 특히 문학 작품 속 주인공들과의 가상 인터뷰를 각 글의 말미에 배치함으로써 이 책은 산파술적 형식을 통해 사랑에 대한 대화록이나 명상록을 작성하고 있다.
다시, 사랑에 대해 (잘못) 말할 수밖에 없다면, 말 하는가 아닌가의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는가가 중요하다. 사랑의 본질은 없다. 본질에 다다르려는 시행착오만 있을 뿐이다. 사랑은 언제나 공백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서도 인용하고 있듯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마라. 미워하는 사람을 만들지 마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 괴롭다”는 부처의 말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다는 것이 저자의 사랑관이다. 그래서 사랑에 관한 이야기 중 이 책의 첫 번째에 놓인 것이 바로 솔로몬의 사랑일 터이다. 잘생기고 부자이며 권력까지 겸비한 소위 ‘킹카’ 혹은 ‘완소남’이었기에 예순 명의 왕비와 여든 명의 후궁을 두었던 솔로몬의 사랑은 감미로우나 박약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제나 원하기만 하면 누구하고나 사랑에 빠질 수 있어 거절이나 시련, 투쟁을 모르는 사랑이란 깊이나 힘을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드러나듯이 저자가 전해주는 사랑이야기들의 중요한 특성은 이별, 질투, 분노, 죽음 등 사랑과 대척점에 놓여있는 것들로 취급되어 온 것들과 사랑의 쌍생아적인 면모이다. 사랑의 오점과 결핍, 얼룩을 그대로 인정해야 사랑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으로 생각되는 것)과 함께 온다. 사랑은 같은 것끼리가 아니라 정반대되는 것끼리 만나서 벌어지는 갈등과 투쟁 속에서 오히려 활력과 탄력을 얻을 수 있다. 거기에는 우리의 사랑이 완벽할 수 없다는 겸허한 인정과, 사랑을 절대화시키는 데서 오는 위험에 대한 경고가 담겨 있다.

이 책의 커다란 미덕은 이런 사랑에 대한 추상적 인식을 문학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기존의 해석과는 다른 시각에서 사랑의 전복적인 의미를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이 사랑에 관한 문학평론으로도 읽힐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령 유명한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에서는 흔히 말하는 낭만적 사랑의 비극성을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무릅쓰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신성’으로서의 사랑을 읽어내는 식이다. 이때의 신성성은 숙모를 범한 죄라는 문명적 금기와 억압을 거부하면서 자연적 신비를 추구한 자들에게 부여되는 트로피에 해당한다. 에로스와 프시케의 이야기 또한 흔히 연인을 의심해서 이르게 된 파멸의 대표적인 예로 거론된다. 하지만 저자는 금기를 어기고 에로스의 얼굴을 본 프시케를 사랑의 본질을 이미 보아버렸기 때문에 ‘주어진’ 낙원이 아닌 ‘자신의’ 낙원을 찾아 스스로 길을 떠나는 자로 파악한다. 이와 반대로 오셀로가 사랑에 실패한 이유를 질투와 사랑이 동전의 양면임을 인정하지 않은 것, 즉 질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질투를 통제할 수 없었고 결국 질투에 질 수밖에 없었음에서 찾는다. 사랑에 대한 금기나 의심, 질투나 분노라는 사랑의 타자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사랑은 언제나 연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니체의 『안티크리스트』를 함께 읽는다. 선과 악을 대립 개념으로만 보지 말고 삶에서 악을 긍정해야만 인간의 어두운 그림자나 무의식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책의 4부 “악마의 입맞춤으로 구원되다”에 실린 해석들이 빛을 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파우스트』에서 지혜로운 악마인 메피스토가 말한 “저는 항상 악을 탐내면서도 오히려 늘 선을 이룩하는 힘입니다”로 요약되는 선과 악의 상호침투성과 길항 관계는 사랑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지극히 정상적인 혼란’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의 적은 사랑 그 자체이다. 사랑의 내부에 사랑 아닌 것이 있다. 이처럼 바깥이 아닌 내부에 있는 것은 본질에 포함된다. 버릴 수 없다면 내것이다. 그리고 더불어서 함께 살아야 한다.
대표적인 예를 이탈로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에 대한 해석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메다르도 백작은 전쟁에서 선한 반쪽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괴물처럼 살아간다. 하지만 선한 반쪽이 귀환해도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악한 반쪽이 더 낫고, 선한 반쪽이 나쁘다는 말까지 듣는다. 왜일까? “그래도 악은 지루하지 않습니다. 사건을 만들고 다니니까요. 악에는 활력이 있고 긴장이 있습니다”가 그 대답이다. “악이 없으면 활력이 없고 선이 없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니 선과 악은 반대 개념이 아니라 보완 개념에 가깝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가 유명한 창녀 카마라를 통해 얻은 진리가 “도는 일상을 여의고 세속을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의 세속에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 “‘나’를 버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이처럼 이주향의 『사랑이, 내게로 왔다』는 갈등을 금지하고 결핍을 거부하는 사랑이 아니라 그것들과 함께 사는 사랑을 알려준다. 사랑은 순수하고 완벽하며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다. 사랑은 원래 모자라고 위험하며 흔들리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사랑 아닌 것과 병존한다. 사랑의 바깥은 없다. 모든 것이 사랑이다. 그렇다면 그런 사랑 아닌 것들을 없애려고 싸우지 마라. 그런 것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이 사랑을 사랑하는 일이다. 이런 사랑의 철학을 저자는 억지로 강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해시킨다. 쏟아 붓지 않고 스며들게 한다. 탄탄한 문장력과 투명한 비유, 적절한 인용에 힘입은 바가 크다. 대중적 글쓰기에 능한 철학 전공자이기에 가능한 경지이다.

문득 이 책을 읽으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보고 싶어진다. 호퍼 그림의 주제는 대부분 외로움 아니면 고독이다. 그래서인지 호퍼의 그림들에 나오는 커플들은 결코 서로의 눈을 쳐다보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한번 보면 쓸쓸하고 적막하며 슬프다. 주요 배경도 집 자체가 아니라 식당이나 모텔, 주유소, 휴게소, 공항, 버스정류장 등 지속적인 만남이 불가능할 것 같은 ‘길 위의 집’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는 언제나 공간의 내부와 외부가 함께 있다. 그래서 외부와 내부를 동시에 볼 수 있다. 대부분 밤의 시간이기에 어두운 바깥에서 불 밝혀진 내부를 보는 식이다. 그럴 때 둘은 하나가 된다. 그래서 호퍼의 그림들은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슬픈 그림은 아니다. 마치 커플들이 서로 눈을 마주치지는 않지만, 제3의 인물을 통해 타자화된 시선으로 상대방이나 자신을 돌아보는 이치와 동일하다.
‘사랑이, 내게로 왔다’는, 그래서 이 책의 내용의 절반만을 말해주는 제목이다. 이 책을 읽으면 ‘내가, 사랑에게로 갔다’는 체험까지 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을 읽지 않고 사랑을 느끼게 되며, 사랑을 생각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직접 겪고 싶어진다. 운명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의지로서의 사랑을 중시하게 된다. 사랑도 공부가 필요하고 연습이 중요하며 실천이 관건인 실존적 행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가 무척 좋아하는 듯한 산도르 마라이의 “사랑은 파괴적 열정이지만 그걸 지나가야 또 뭐든 창조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라는 말을 체감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사랑에 대한 또 한 권의 (꼭 읽어야 할) 오독서가 탄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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